내가 임 동 식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연분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다. 그럴 것이 내가 임 선배를 알게 된지가 근 30년 가까이 되는데다가, 그와의 관계가 줄곧내가 흠모하여왔던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업자이기도 하면서 서로의 지기로서 내가 논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작업에 대한 본격적 이해를 돕기보다는 그의 성향과 기질을 토대로 말한다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일 터이다. 누구든 임 선배의 작업을 논하려 한다면, 먼저 우리의 주변에서 여간해서는 만나보기 어려운 그의 기질이나 성품을 엿보는 것이 그의 작업 세계가 줄 수 있는 매력에 접근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임 동 식은 전혀 튀어보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은둔하는 자폐적 습성을 지닌 것으로 보일 정도로 세상과 접촉 없이 무덤덤한 듯 지내지만, 가만보면 이 세상에 대해 은근하면서도 강렬한 반어적 비판을 숨기고 있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다. 어떤 때 보면 너무 물정모르는 어린애처럼 순진하여 답답하게 하다가도 범상치 않은 상상력으로 주변의 시선을 놓아주지않는 그를 대체 어디서부터 논할까? 오랜 세월 내가 경애해 왔던, 그 외골수로의 집착에서 오는, 얄밉기도 한 특유의 은둔자적 감성과, 그래서 사물을 남달리 읽어낼 수 있었던 각별한 사색을 담은 시선이라든가, 언제나 이방인과도 같이 좀은 낯 선, 소년처럼 맑고 깊은 눈, 이런 독특한 매력의 스침들을 어떻게 글 몇 줄로 토해낼 수 있을까? 게다가 내가 왜 이 글을 맡게 됐을까? 이제는 그도 나도 나이가 들만큼 들어 호기심도 열정도 아무래도 전과 같지 않아서 못내 미안 할 정도이다. 서로에게 미지근해진 즈음이 아닌가. 사실 지금 나는, 그간 누구도 억누를 수 없는 그의 독존적 아집과 질겨 보이는 피부를 감싸는 굵은 곱술 머리털/수염하며, 예의 총명한 눈빛과, 밤을 새는 담화에도 지칠 줄 모르던 거시기한 기운과는 멀어져가는 그의 노쇠함에 크게 실망하게 된 것이, 사실 그는 일찍이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섬쩍지근 하리만한 사려와 뛰어난 기억력과 관찰력을 가지고, 우리 주변을 지켜보는 목격자와 같은 증언을 품고 사는 낯선 힘을 갖고 있었다. 이런 부담을 나눈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 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느 덧 그런 범상치 않은 힘들이 쇄진한, 탄력을 잃은 그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나로서는 못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게 우리의 주인공은 언제나 늙지 않을 것 같았던 신비한 힘이 있었고, 늙어서도 아니 되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 화단에서 작가 임 동식을 아는 사람들이 결코 많지 않다. 많지 않다기보다는 그를 아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고 해야 할 판이다. 그렇게도 임 선배는 세상과 화단을 모두 등지고 돌아앉아 있었다.(이런 연유에서 내가 여기까지 불려나왔다고 본다.) 게다가 임 선배는 근자에 와서 발표 따위는 등지고, 거의 개점휴업에 가까운 과작을 하는 셈이다. 그러면 임 선배는 누구인가? 대체 그는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던가?

그날, 그 광장에는 수 천 개의 하얀 유골 상자들이 무더기로 쌓여 산을 이루었고 그 위를 대형 태극기가 덮고 있다. 흑백 농담으로만 칠해진 대형 태극-기가. 고개를 들어 본 김포 쪽 하늘에는 시뿌연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광장의 사방에 세워진 대형 스피커에서는 하이 볼륨으로 터져 나오는 <신고산 타령>. --- 신 고 산 이 우 르 르 르 르 르 르 ----- 때는1973년, 월남전에 끌려갔던 임 선배가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오후, 문득 광장(당시는 5-16광장이라 이름 지어졌으나 지금은 여의도 광장)을 바라보는 착잡한 임 선배의 심상에 떠오르던 하나의 거대한 가상 설치 작업이다. 이 작업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이듬 해 “청년작가 전(1974)” 때는, 100호 캔버스에 시뻘건 색을 칠하고 붕대를 감는 작업을 출품 한다. 또 다른 캔버스에는 노란색을 칠하고 고무줄로 칭칭 동여매어 조여 오는 힘의 긴장을 보여준다. 그리고 1975년에는 난생 처음 보게 되는 서해 바다-안면도 꽃지 해변의 드넓고 탄탄한 백사장에다 석고로 빚어낸 커다란 알 형상들 30개(길이;70cm.지름;40cm)가량을 여기저기 떨어뜨려 놓는다. 이 당시 구상되고 실현된 임 선배의 이런 일련의 야외 작업들이야말로 세계 미술계의 흐름에서도 가히 선구적인 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밖에도, ‘자연미술’이란 말이나 이런 개념 아래서 작업하는 일련의 행위들 또한 개척적인 위상을 얻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1984년 독일에서 처음으로 <나투어 쿤스트>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작업이 실행되던 시기에 이미 임 선배의 유학은 진행되고 있었고 그런 과정을 통해 그와 그가 이끄는 후배들의 일련의 작업들이 함부르크 대학 현지에서 소개되어 열렬한 반응과 감흥을 주고 있었다. 임 선배의 입학 청구 프레젠테이션 중에 소개된 “금강 시절”의 이런 일련의 <야투> 전후의 작업들은, 버뮬러 교수가 놀라워했고 격찬해마지 않았던 소식을 생생히 기록했던 것을 나는 본적이 있다. 이후 주로 나타나는 임 선배 특유의 “자연-생명에의 사유 작업” 연작에서 두드러진 점은 첫 째, 음향-소리를 빗대는 은유적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후 그의 음향-설치 작업들에서 실제로 스피커를 오브제와 기능 매체로 동시에 쓰여 진다. 50p) 주로 1984년을 전후한 작업들--“생명의 음”을 듣는 평화로운 동작들이라는 일련의 제스쳐 작업들--계란 몇 알을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고 마치 심장의 박동을 들려주려는 듯 한 애절한 몸짓(76p)은, 다시 직접 알을 헤드폰처럼 만들어서 귀에 대고 듣기 시작한다. 이 작업은 이어서 계란-알로 된 부처의 귀의 모습으로도 전개 된다(56p). 이와 같이 그는 계란-알들을 독특하게 운용하였던 편인데, 쪼개진 계란 껍질 속에 자신의 오래된 얼굴사진들을 담아서 여기저기 배치하는 것도 있지만, 단연 계란 시리즈의 하이라이트는, <T-V는 부화시키는가?(2000)>가 아닐까(30-31P). 방송조정 화면만 켜진 채 뉘여 놓은 티-비 화면위에 올린 계란들-오리 알들이 비닐 랩에 쌓여서 따뜻하게 데워진다. 과연 오늘의 티-비의 온기가 계란을 부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알 시리즈들에 이어 나타나는 두 번째 징후들을 나는 ‘꽃-처럼’과 ‘풀-처럼’ 시리즈라고 불러보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 것들로는, 꽃송이에 다가가서 봉오리에서부터 피어나는 과정의 신비한 힘을 손의 제스처로 재현 한다. 손동작과 꽃봉오리의 움직임을 일치시켜 개화의 힘을 느껴보려는 ‘꽃-처럼-되기’를 염원하는 동화 감정을 담고 있는 것들(74p) 이라고 할 수 있다. 꽃과 풀 시리즈들은 계속 되는데, 지난 봄 유럽을 여행할 때, 이쪽으로 고개를 꺽고 있는 한 무리의 수선화를 볼 때 떠오르던 임 선배의 어떤 작업하나. ----길가다 만난 수선화를 향해 허리를 굽혀서 경례를 나누던 임 선배의 사진. 임 선배 왈; 어느 날, 길을 가다보니, 이쪽을 향해서 고개를 꺾고 있는 수많은 수선화 구루들과 마주쳤을 때, 갑자기 수선화들이 겸손하게 머리를 숙여서 이쪽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있더라는 것, 그래서 자신도 고갤 숙여 경례를 하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풀잎과 마주한
“자연과의 일체감 같은 것을 꿈꾸면서, 또는 느껴 보고픈 마음을 싣고자 하는 표현”인데, “말하자면 그런 ‘농담’ 비슷한”그런 것이란다. 몸에서 나는 수염 줄기와, 땅에서 나는 풀잎 줄기를 서로 연결하여 한 끈으로 비끄러매어 어떤 미세한 진동이라도 나누 수 있을 것만 같은 일체감과의 만남을 꿈꾸어보는 긴장관계(53p), 이는 몹시 천진한 발상이기도 하지만, 거창하게 비유하자면,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서처럼, 여호와가 불어넣는 창조적 생기의 불꽃이 튀는 순간이라고나 할, 그러나, 에너지의 일방적 흐름과는 다른, 대등한 누림의 은유가 아니던가. 그밖에도 아주 순박한 표현으로, 갯가에서 주은 조개껍질들을 꽃잎처럼 펼쳐서 모래판 위에 붙여놓고 꽃의 줄기를 그어서 완성하는 것들(66p)이나, 1987년 자연미술 운동의 거점이 되었든 북부 독일 노이에 베르크섬에서 “자연관찰로부터 미학원리로”라는 캐치푸레이즈로 진행된, <독일과 프랑스 청년교류 프로그램; 자연과 미술 심포지움>에 초청되어 실행한 작업들이 있다. 주변에 뒹구는 마른 풀들을 주어서 마치 그 무인도에서 방목하고 있는 ‘염소-처럼’, ‘토끼-처럼’ 형상들을 지어 놓는다(60-61P). 이 외에도, 풀숲에 풀과 더불어 누어서 벌린 입에 밤새 내리는 이슬을 받아먹는 ‘풀-처럼-되기’(58P). 이것은 다시 현장을 떠나온 후 실내 전시에서 입을 벌리고 누어있는 여러 컷의 사진들, 그리고 현지에서 채집한 풀들과 함께 유리로 덮고 그 위에 역시 현지에서 담아 온 물방울들을 드리운다(58P). 섬을 떠나면서 한 웅큼 주어온 무인도의 모래를 가지고 돌아온실내에서는, 자그마한 섬의 형상을 닮은 모래섬으로 옮겨 짓는다.

‘자연미술’이라는 바탕에서 ‘마을 공동체 미술’ 개념을 구현한 임 동 식

--- 임 선배의 작업 여정에서 모던한 평면작업(<見分> 시리즈)을 하던 홍대 졸업 전후를 제외하고 네 간격을 본다.
* 야외미술의 시절
* 자연미술의 시절
* 공동체미술의 시절
* 원초미술의 시절
(분류해 놓고 보니 그럴 듯하기도 하고 과장 되어 보이기도 하다.)

나와 임 선배가 본격적인 만남을 이루던 계기가 옥외미술에의 장소적 관심이 투합 되었던 대목에서 연루 한다. 1977년 인가? 나 또한 이 나라 서울 화단의 허황된 생리와 모교의 교수는 물론 동문들까지도 이해관계로 짜여진 현실 행태에 대한 격분을 달랠 수가 없어 딴엔 비장하게 낙향을 택하고 말았던 참이어서 우린 만나자마자 단번에 가까워 졌으며, 곧 후배들과 뜻을 모아 탁트인 금강 백사장 품에 안겨 미술제를 꾸미기에 이른다. 이것이 우리의 첫 야외미술(off the road/outdoor-works)에의 실행이자 이름 하여 <금강현대미술제>라. 지금 보아도 이름이 좀 거창 하였던 것이 당시 아무래도 우리의 허전한 가슴을 달래지 못했든지 바람이 어지간히 들었던 모양이다. 20여명이 모여 열성을 보인다. 뙤약볕에서 작업하고 사진을 찍으며 편집, 표지디자인을 신경 쓰면서, 당시 돈은 어디서 났는지 나름대로 격식 있는 카다록도 만든다. 세미나란 것도 하고, 원고도 발표하고, 그렇게 밤도 샜다. 그러던 중, 내가 뭔가 내키지 않는 것이 있어 얼마간은 조심스레 만류했으나 까딱않던 임 선배는 기어코 어린 후배들을 모아 야외미술 그룹 <야투>를 결성하고야 만다. 그러나 못 믿어 워서 얼마나 가슴이 아리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집착하던 <야투>를 뒤로한 채, 임 선배는 독일에 사는 손아래 누이의 강권에 이끌려 그에겐 너무 어울리지 않는 유학의 길을 떠나고 만다. 그 길이 9년 만에야 돌아올 수밖에 없는 길이란 것을 임 선배조차 꿈엔들 꾸었으랴. 우리의 질박한 향토작가가 그것도 서양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존심이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을 터 이니까. 나에게는 이런 낯선 근황의 심경을 어린아이처럼 섬세하게 토로하던 서신을 한 때 여러 차례 받고 있었으나 지금의 내 수중에 남은 것이 거의 없어 안타깝다. 그 중에는, 이제나 저제나 귀국만을 꿈꾸는 오라버니의 심사를 누구보다 잘 알아차리고 있는 누이의 배려(?)로 항공료를 조달할 곳 없이 봉쇄된 채 막막히 이국에 남아 있는 처지를 하소연 하던 서신의 구절도 생각난다. 그 후 <야투>는, 가끔 듣기에도 애절하게, 어미 떨어진 자식들 신세가 된 채 똘똘 뭉친 힘으로 이국말리서 시달되는 '사부의 말씀(교시)’을 각별히 챙기길 마치 교주처럼 떠받들고 그 뜻을 모셨다. 임 사부의 원격 조정 장치는 완벽히 가동 되었다. 정말 놀랍게도 이 당시 <야투>회원들은 작품집을 계절마다 한 편씩을 꼭꼭 만들기를 근래까지 십 수 년 가까이 돼가고 있었으니, 가히 이들의 지고지순한 열성은 임 사부에 대한 교조적 마력에 취한 뜨거운 신심의 결과가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물론 우리의 현대미술사에 남을 보기드믄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임사부의 집요한 독려의 위력이 어땠는가는, 그 시절 임 사부가 입학한 함부르크 대학에서는 학생들과 교수들조차 거의 혼줄이 나갔을 정도로 그에게 반하고 흠모하게 되었다는 당시의 경이로운 사정이 반증하리라.(함부르크 대학에서의 이런 압도적 감동이 이어져 임 선배는 훗날 ‘특등’으로 졸업을 하며, 해마다 전 독일에서 모든 학문 열 두 분야를 통틀어 단 한 분야 한 사람에게만 수여하는, ‘학문과 예술의 후계자 장학금’<아인슈티펜디움>까지 수상한다. 이 당시 독일과 교류하고, 교환된 자료들이 누구에겐가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귀국 즈음하여 임 선배가 공주에서 거의 단독으로 이끌고 개최한, 한 달 간의 워크숍을 통한 <금강에서의 국제자연미술제(1995)>에 기꺼이 자비를 써가면서 모여들었든 백여 명 가까이 되는 독일어권 작가들의 열렬한 호응도를 보았어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임 사부의 원격조정 전후, 이런 관계들을 바람직하게 볼 수만 없었던 그늘을 느끼고 있던 차, 내가 한 말씀 날린 것이 씨가 되어 그 후 한 10여 년 동안이나 우리 사이가 소원해지기까지 한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언제나 그렇긴 했지만, 당시 임 선배의 은근하면서도 끈끈한 인간됨의 매력이 하도 강렬하여 어린 후배들의 감성에 깊이 각인 되던 바, 내가 보기엔 전염이나 흉내내기에 빠지게 되는 불길함을 우려 하였던 것 같다. 이런 나의 약간의 충고와 만류를 제치고 임 선배는 의연히, “야투는 자연과의 신선한 접촉을 통하여 야외미술을 연구하는 모임으로 자연에 대한 강한 사랑을 바탕으로 그의 순리적 변화, 무한한 넓이와 두께, 그 가운데의 모든 생명력을 예찬 한다”고 창립전 카타록(1981)에서 선언한다. 특히 누구보다도 살아있는 것들을 따뜻이 대하고, 풀 한 포기라도 예사롭게 보아 넘기지 않는 임 선배가 좋아하는 표현들이 있었는데, 가령 “들에 핀 야생초와 같은 생명력”이라든가, “풀한 포기의 떨림에서부터 여치의 울음, 개구리의 합창, 새, 물고기, 나뭇결에 스치는 바람소리, 밤하늘의 별빛, 봄의 꽃,” “― 자연음의 충만함”이나 “스치는 바람결에 떨림의 춤을 추었던 초목” 등등. “돌 항아리에 밤이슬을 받아 부어 흘려놓은 듯 한 금강물”에 반한 임 선배의 이런 시적 표현들이 그 취지문에 잘 나타고 있다. 당시 취지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1981년, 7월 하순, 호박잎이 커질 무렵, 그 위에 떨어지는 밤 소나기를 들으며, 구 공주여고 교실-작업장에서 쓰다.” 아, 이 얼마나 토속의 정취에 사무치는 자들만이 볼 수 있는 낭만이요, 예찬인가. 대체로 이런 식이 그의 감성적 집착이고 그의 수사 의지인 것이지만, 나는 이런 그의 낭만적 자연 취향 일변도의 수사적 감성을 얼마간은 거스르고자 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그의 축약된 불교식 개념 집착에 크게 동의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가령, 묘유라든가, 비무비유, 또는 무파적 회화, 부정관 등등의 불교적 용어들의 과장된 정서와 그 쓰임새가 너무 구닥다리거나 어색하여 무슨 망념의 징후처럼 보이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사실, 임 선배의 기질대로의 언어적 표현에는 뭔가 재미있게 시적으로 과장되거나, 강렬하고 진하게 짜내는 듯 한 의도적 느낌들이 묻어나오는 데 이런 수사법이나 억양들이 바로 그 됨의 매력이면서도 뭔가 고약한 저의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가끔 드러낼 때가 있는 것이다.

우선, 그는 내가 알기로 평생 혼자 살면서, 지금까지 돈벌이다운 돈벌이는 해 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그는 미술이란 문제를 떠난 어떤 생활이나 그 밖의 것은 상상 조차 해본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그는,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외길을 가는 집요한 예술가이기도 하고, 현실 생활을 포기하거나 의도적으로 거부한 금욕주의자이기도 하다. 나이 육십이 되도록 미술이라는 문제를 떠난 것이라고는 어느 무엇도 생각하길 내켜하지 않았던 인물인 임 선배가 내심 반발하였던 미술 영역은 “화랑이나 미술관의 벽을 향한 미술하기”가 아닌가 한다. 그 만큼 임 선배는 삶의 터와 엮인 예술의 가능성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랬다. 그렇다고 임 선배가 삶의 영역-환경이 생생히 빚어내는 이슈들을 곧장 작업에 끌어드리는 작가는 아니었다. 그의 작업에는 막상 젊은 시절 몇 작업을 빼놓고는 거의 정치-사회비판적 상황을 직접 작업 모티브로 다룬 것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관심과 사회비판적 통찰 또한 언제나 남달랐다. 지난 총선 때도 놀라울 정도의 별의별 정보 매체들을 밤새워 접하면서 그 매체들의 입지 여건 상 배척하고 외곡-억압한 어떤 숨겨진 사실과 견해들을 추측하고 끄집어내는데 탁월한 견해를 보이는 틈새 읽기의 영민함을 과시하곤 했다. 물론 우리 화단의 부정한 현실과 거기에 얽혀있는 그의 모교 원로 작가-교수들에 대한 비판들도 일단 그의 차분하기만 하던 입을 통해 터져 나오게 되면 남다르게 생생하고 예리한 해학적 저주가 깃들곤 했다. 그 만큼 총명한 임 선배는 우리화단 현실을 누구보다도 견디기 어려워했던 것이다. 대학 졸업 후 잠깐 동안 서울에 남아있을 때, 홍익대 주류 세력에서 빗겨났던 한 고향선배가 이끄는 ‘청년미술’ 동인회를 도와서 편집 일을 본적이 있으나, 미구에 이 회합의 두목의 속셈을 꿰뚫고 나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그 자’의 만류를 뿌리치고 낙향하고 만다. 이로부터 십년도 되지 않아 임 선배의 날카로운 예언대로 그 집단의 대표였던 ‘그 자’는 결국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 라는 감투를 쓰고야마는데, 종래 그 모임의 세력화를 이용하고 말았다. 이런 낌새를, 예민한 임 선배는 일찍이 ‘그 자’의 인품 됨에서 알아채고 서울을 떠나고 만다. 이때부터 임 선배가 중앙화단을 터부시하고 경멸하는 <신토불이 예술관>을 굳히는데 ‘그 자’와 모교 교수들이 한 몫을 잘 거든 셈이 된다.

비록 과작을 하는 게으른 작가이지만, 내가 만난 이후의 임 선배의 작업을 4개의 노선으로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첫째가 제도적 공간을 벗어난, 야외미술에 대한 동경의시기요, 둘째가, 독일 유학을 계기로 더욱 굳혀진 자연미술의 시기. 셋째가 마을 공동체 미술 시기. 넷째가 다시 홀로 돌아서서 채집/수렵기와 같은 원초적 모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시기라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런 시기 별 분류를 관통하는 임 선배 특유의 사유 어법으로 만들어지는 무수한 드로잉들은 언제나 가능했고 우리에게 잔잔한 웃음과 감동을 주고 있다. 나는 특히 임 선배의 드로잉들에 열광하는 편인데, 대부분이 독일 유학시절 타향에서 외로이 격리되었던 늑대의 본성을 달래면서 나온 것들로 보인다. 그림은 그린다는 사실이 즐거운 감성을 만들어내기도 하겠지만,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마음을 달래는 일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임 선배의 드로잉 작업에서 본다. 이 땅에서 작업이라고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사로잡혀 보았을 회의지점을 임 선배도 가끔 만나는 자리에서 수줍게 멋쩍어 하면서, 특유의 조용하면서도 능청맞은 느린 어투로, 미술을 한다는 것이 암만 보아도 어떤 미혹됨이 이끄는 것이 아닌가 한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마치 악마에 홀린 듯한 이런 회의가 가족을 통해서 부추겨 진다면서, 눈 밝을 때 떨치고 일어나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며, 마치 남 얘기하듯 히히거리면서도 결국 이런 종용을 해오던 가족들과도 멀리했다. 사실 내가 보기엔, 임 선배의 그 숫한 값싼 갱지 위의 드로잉들은 이렇다 할 재료비가 들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경우가 아닌가 한다. 바로 이런 궁핍한 조건 들이 임 선배 특유의 궁상맞은 기법의 드로잉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갱지 오리기, 뚫기, 담뱃불로 태우기, 지우개로 지우고 난 찌꺼기를 되 붙이기 등등이 무료함을 달래거나 갑갑함을 달래고자 그가 발명한, 궁상맞으나 독특한 일련의 드로잉 기법이 되는 셈이다. 그의 숫한 드로잉 작업들 중에서도, 단 한 장의 자그만 갱지 위에 심청전의 대략적 이야기를 아우르는 장면으로, 신통한 표현법은, 심 봉사가 개울 위를 걷다가 빠지는 모습이과 심청이가 인당수에 뛰어드는 모습들이 하나의 드로잉으로 두 상황을 연출해 낸다는 점이다. 하나의 드로잉 위를 다시 칼로 오려낸다. 오려낸 형상을 이번엔 뒤집어서 풀로 붙인다. 이런 기법도 임 선배 아니면 어울리지 않을 특유의 무료하고 질긴 일상의 금욕적 사색을 통해서 개척될 수 있는 그런 것으로 보인다. 이런 유형의 감성과 정서를 보여주는 것들로는, 고목나무 가지를 물어다가 집을 짓는 까치-- 먼저 그린 나뭇가지들을 오려내어 다시 나무아래 흩뿌리고 그 것을 다시 주어 올려 풀을 붙여서 새집을 엮어 짓는다. 하나의 장면이 그려지고 오려낸 것이 교묘히 한 화면에 짜이는 동시성의 시각적 게임은 기발하고 참신하다.

------------------임 선배의 작업에 나타나고, 그의 작업을 통해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자연에 대한 열망은 이 세상에 생명을 갖는 것에 대한 외경감과 인류의 원초적 감성에 대한 그리움을 내포하고 있는 생태 미학적 윤리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감성이 새삼스런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제는 너무나 순진해보이고 촌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인 상투적 감성도 임 동식이라는 사람을 통해 만나게 되면 전혀 색다른 설득력으로 새삼스러워 진다는 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어미 잃은 산토끼를 두 마리씩이나 근 8개월 동안을 아기 기르듯 모성의 체온을 품어가며 길러냈다는 얘기는 주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가슴에 감격하였던 것과는 달리 나에겐 너무나 심란하여 거시기한 냄새를 못내 참을 수 없어 한동안 섬뜩 했음에도, 또 닥치면 새삼스러워지곤 한다. 그렇지만 임 선생님, 내가 가끔 임 선생님의 견해에 억지 청을 놓듯이, 자연은 우리 정신과 그렇게 분리되고 괴리돼 있는 요원한 것은 아니랍니다. 왜냐하면요, 우리의 정신이야말로 우리의 외부에 있는 자연 세계의 수많은 부분의 반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란 거죠.
--- 하여, 모든 생명체에는 스스로의 이유를 갖는 구조, 형태, 색을 띠게 마련이기 때문에 이런 생면 현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오랫동안 고정되어온 인간 중심의 언어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명 문화 공동체 의식’을 보다 자연 친화적인 인식을 통해 일깨울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임 선배 식의 감성적 접근은 유효하며, 오로지 자기 식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풀 한포기를 드로잉하면서도, 그가 그렇게 했듯이. 당연히 자연 친화적 문화 공동체의식이 싹 텄을 터였다. 공동체 문화로.

원골 마을 ----인간들의 모듬살이의 원초적 기본 단위 인 촌락, 즉 마을이란, 장소와 경관이라는 자연-지리적/환경적 특성과 밀접한 개념인 것이다. 자연미술에서 농촌 마을 공동체미술로의 변화는, 임 선배의 미술세계에서 볼 때 아주 자연스런 추이이자 당연한 한 귀결점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임 선배가 홀로 탄생시키고 그렇게 소중히 여겨오던, 자연미술 그룹 <야투>와 결별하고 등지는 노정에서, 원골 마을의 공동체 미술이라는 희대의 꿈을 실현하는 것으로 그의 열정과 집착은 선회하였던 것이다. 여기가 물론 원골 마을 미술제를 새삼스레 소개하거나 논할 장소는 아닌 것이다(궁금한 분들은 자료 :“藝卽農,農卽藝, 예술과 마을 2000”을 보라. 그가 얼마나 몸을 살라 만든 자료집이었던가.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당신은 그의 헌신적 됨됨이와 한 마을의 공동체 의지를 엿볼 수 있으리라). 다만,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임 선배만의 뛰어난 통찰이기도 한--신토불이 예술관을 구현하였던 한 사례를 집고 넘어갈 뿐이다.
바둑을 두는데 장고 형이 있듯이, 그림 한 장을 완성 하는데도 장고 형이 있다면, 임선배가 바로 단연 장고형 미술가라고 볼 수 있다. 내가 보아온 것만해도, 캔바스 한 장을 완성시키는데 무려 7-8년은 좋게 걸리는 것 같았다. 이 말은 그가 한 작품에 심혈을 쏟는 줄기찬 세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작업에 대한 접근을 그렇게도 뜸을 드리면서 질기게 시간을 끈다는 점이다. 과작을 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실은, 이렇게 그가 그 동안 그려 온 그림은 전시라는 형태로 바로 이어지는 화업의 길을 가는 일반적 화가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만큼 그는 발표나 전시라는 제도를 등한시 했다. 아니, 그의 신토불이 예술관에서 본다면, 작품이 제작 환경을 등지고 떠나서 도심의 전시장이나 유명 미술관의 벽을 지향한다는 발표행위 성향 자체가 어불성설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임 선배는 한 때, 작업행위가 서울 전시로 곧 바로 연결되던 나의 작업 활동 행태를 은근히 고깝게 여겨서 얼마간은 나와 소원해 졌던 적도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 정도로 그가 꿈꾸는 이상적 작업관은 엄격하게도, 작업이 생성되는 작업토양(환경)과 그 작업의 발표장(회향지점)이 일치되어야 한다는 고집이다. 나는 이를 일러 본격적 <신토불이 예술(작업)관>이라고 불러본다. 이 세상에서 누가 또 감히 이런 생태미술의 가능성을 믿고 실천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이야말로 또 하나의 불가능한 우리들의 꿈이 아닐까 보냐. 그러나 그는 독일에서 돌아와 미구에 원골이라는 깡 시골마을에 정착하면서 기어코 그가 꿈꾸는 이중의미를 한꺼번에 달성하는, 신토가 불이한 마을 공동체 미술을 구현해 낸 것이다. 나에게 그가 드물게 소중한 인물로 다가온 것도 바로 이러한 그의 범상하면서도 엄격한 예술관과 그 금욕적 실천의 고집 때문이다.

신토불이 예술관의 실천
임 동식은 삶을 통해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 삶의 방식이야말로 농경문화에서 나온다고 보고, 공동체 미술의 가능성을 위하여 "10년의 독일 생활을 청산하고 원골이라고 불리는 궁벽진 농촌마을에 입주하여 지낸 7년 동안은 땅과 자연율에 감응하여 이루어진 공부"라고 표현한 바 있다. 또 원골에 입주하여 사는 공부를 하는 정황을 다음처럼 술회한다. "1993년 봄, 공주시 신풍면 원곡마을 입주, 감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터에 맨손으로 손수 지은 작업장 25평. 터 잡기부터 시작하여 건물골조ㅡ 지붕공사, 벽면처리, 내장공사, 배수로ㅡ 화단공사 뱀이나 쥐에 대한 신경 쓰기ㅡ 여름에 모기, 파리 대책, 겨울의 온돌방에 매일 군불 때기, 즉 인간생존의 1차 문제를 공부하다.―" 그는 자신의 이념을 실제로 자연스럽게 구현하였던 것이었는데, 원골에서 만난 아이들과 친교하며 그가 평소 좋아하던 농구는 동네 주말 경기로 주민들을 아우르며, 바쁜 농촌 일손으로는 돌볼 수 없어 성적이 떨어지기만 했던 아이들을 모아서 영어, 독일어, 한자 등 그가 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글을 가르치니 이들 성적이 무척 올라, 도리어 부형들의 답례를 사절하느라 별난 고심을 할 지경이었다니. 당시 그를 사로잡고 있던 이념, 농사가 곧 예술이아니더냐, 라는 생각은 아래의 선언문에서 이때의 정황과 더불어 잘 드러나고 있다.

선언문
--모든 생명체들은 지표 현상의 대등한 일원으로서 자연에 감응하는 생명현상을 삶의 문화 로 보존한 우리 농경문화의 현대적 가능성을 자연미술로 부활시키고자 하였다.
-- 도회중심 인조환경문화 일변도에서 소외된 농촌생활의 생활과 더불어 살아있는 자연미 술을 창출하고자 7년 동안 같은 삶의 토양을 나눈 마을 주민들과 함께 궁리하고 수행하 였다. 이는, 우리 농경문화의 근본정신과 유리될 수 없고 유리되어서는 안 되는 현대문화예술의 자연친화적 국면을, 한편으로는 구체적으로 교감하고자하는 희망의 시각 속에서 개척 발굴하고자 함이다.
―-20세기가 인류에게 가져다준 관학산업, 대도시의 팽창으로 인하여 자연과의 친화된 삶의 고리가 끊어진 점을 각성하고 자연미술의 방법으로 전원의 생명을 현대사회에 되돌리고 자 하였다.
―-농촌주민들이 자연미술가라는, 즉 모든 이들에게 잉태되어있는 미술을 드러내 이룰수 있는 기본인자를 재확인하게 됨으로서 미술자체의 틀이 갖는 종적논리를 벗어나 수평구조로써 인간사회에 환원 시키고자 하였다.

---십 년 만에 독일에서 돌아온 임 선배가 원골에 정착한지 여러 해가 지나면서 원골 마을에 어떤 감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그의 근황에 새삼스런 흥미를 가지게 된 계기가 바로 <예술과 마을>이라는, 획기적이고 생기 있는 ‘마을 공동체 미술’ 개념의 실현이란 사실이다. 오죽하면 그 동안 이 마을에 스며든 한 외진 ‘화가선생’의 삶-예술적 태도에 감응하여 이런 마을 미술제를 이루어 냈겠는가. 말하자면, 한 외딴 미술가의 정신과 이 마을 농심의 감성이 상호 교감한 결실을 이루게 된 것이다. 여기서 이 마을이 거두어낸 가장 중요한 사실은 농사가 곧 예술이 아니겠는가 하는 쟁점이 아니라, 미술작업이 이 원골이라는 한 마을을 살림문화 공동체로 엮어내는 계기(깨우침, 친화력)가 되었다는 점이다. 농사가 예술일 수 있다는 생각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농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농사조차 예술의 문맥 속에 배치하여 새로운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미적 감성이 어떻게 자연(생명력)과 조응하고 생활에 상호 반영되는지를 아는 가운데 우리의 일상적 미적체험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만큼 자연은 우리의 관심과 의문 방식에 따라 그렇게만 대답해 주고 있다는 의미에서, 미적 체험이란 나의 지속적 호기심과 흥미의 반응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부디, 원골의 넉넉하고 아름다운 농심이 <예술과 마을>이라는 새로운 문화적 공동체 개념의 전환적 기폭제를 만나, 농사라는, 경제와 삶의 터가 일치된 ‘터 문화’를 이루는 속에서 일상의 예술적 감흥과 생기를 배양하여, 삶과 예술적 감흥의 장소가 따로 있거나 멀리 있지 않았다는, 이를테면 먹거리와 볼거리의 ―- 신토불이의 발견과 실천으로, 당초의 취지를 일관되게 살려 이제는 도시 문화생활이 잃어버린 특수한 정서를 문화적 자본으로 키우는 데 주민 모두가 보다 멀리 내다보는 안목을 견지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오늘날 하나의 마을이라는 전통적 공동체 문화가 어떻게 우리 일상의 경제적 삶의 터와 상호 창의적으로 엮어나갈 수 있는지 보고 싶다. 그러나 미구에 원골에 대한 나의 경각(원골에 부티는 글)이 발효가 되기도 전에 내가 우려하였던 바가 내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홀로, 원초적 몸 씀을 향해
집단 농경문화의 가능성을 누리다가 다시 홀로 되는 길을 떠나게 된 임동식이 다음에 만나는 것은 그의 팔자대로 과거로의 회귀가 일어난 것이다.---------------------
임 선배의 최근 생활 동향이면서 근래작업의 모티브가 되고 있는 것은, 공교롭게도 동갑네로 새로 사귀게 된 한 식당주인 이었는데, 임 선배는 거시기를 통하여 채집과 수렵이라는 선사시대 인류의 모델을 보기 시작한다. 현대사회 여러 현상을 매우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임 선배다운 꿍꿍이로, 근래 와서 더욱 관심을 갖고 심지어 내심 동경하고 있는 인류의 선사 시대적 삶의 행태와 그런 야생적 생명력으로의 귀의마저 꿈꾸는 임 선배 앞에 우연히도 나타난 인물인 바, 거시기가 바로 산과 들로 약초와 버섯을 찾아다니며 인류의 먼 조상을 닮은 생활을 마다않는 동갑네기 한 사내였다. 임 선배는 그 동갑네 사내를 통해서 그가 그토록 그리던 인류의 먼 조상, 채집/수렵인 을 닮은, 외롭지만 자유로운 인류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에게 미래는 어쩔 수없이 닥치게 되는 것이지만 과거는 발굴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무엇이었다. 임 선배가 바라는 것으로, 오늘의 정보화 사회, 극도로 혼성된 도시문화와 산업사회의 문화적 오염을 세탁할 꿈을 꾸는 방법은, 인류가 역사 이전의 수렵과 채집과 같은 몸 씀 방식으로 귀의하여야만 찾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꿈이 철없이 순진하다거나 퇴행적이랄 수도 있지만 어쨌든 누구보다도 임 선배다운 발상으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그 야심참이 깜찍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반발의 발상 이면에는 지극히 단순한 임 선배다운 촌스런 자괴감이 또한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 우습다. 평생 그림 그리는 문제에나 관심을 가지고 이렇다 할 생산적 일과는 등진 채로 살아온 거시기한 팔자로, 게다가 꽃과 같은 아름다운 것이나 즐길 줄 아는, 현실 경제와는 동떨어진 자신에 대한 여리 디 여린 자책감 같은 것을 떨구지 못하는 것이, 가끔 예의 그 차분한 어투로, 자신에게 문화적 자폐증이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는 원래, 주변의 여하한 베풂에도 항상 소중히 하고 고마워하며 감격을 잘하는 성품으로, 자신은 즐기기만 하고 베풀 줄은 모른다는, 완강히 비하한 의미에서 곧잘 “베짱이”로 비유하곤 한다. (임선배님, 우리가 아니면 누가 베짱이 신세가 되겠시유? 바로 그 몫은 우리 것이 아닌 감유? --- 거시기의 고집으로 인한 이런 자괴감을 누가 떨쳐주랴.)

---공동체를 빠져나와서
이 만남의 인연이 이루어낸 성과가 그림으로 나타난 것(카타록- 10-13p까지)이다. 두 번째 -봄 여름 가을 겨울 시리즈가 탄생한 것이다. 재밌는 것은 봄 장면의 물감이 가장 엷게 바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점차 물감의 농도 짙어가며 계절이 변화한다. 이 그림은 백호정도의 크기로 사계절, 즉 4장으로 구성된다. 네 폭의 그림들은 동갑네기 거시기와 자신을 ‘시기적’으로 비교되게 대비시킨다. 이를테면 10대 시절, 자신은 이젤을 둘러메고 그림 그리러 다닐 때, 거시기는 거름지게를 지거나 땔감을 하러 산과 들로 나선다는 대비. 또는, 자신이 원골에서 터 잡기를 하고, 동네 분들과 미술제를 열고 있을 때, 거시기는 약초나 버섯 따기, 칡을 캐고 미꾸라지 잡으러 산과 들로 싸다닌다는 행태와의 대비는 공교롭게도 자연미술을 꿈꾸는 임 선배를 겉돌게 한 팔자로 보이는 듯한 어떤 어긋남과 순환이라는, 그래서 새삼스레 어떤 깨우침을 가져오는, 엉뚱한 부정의 몸짓을 보이면서 그 때까지의 이 세상의 무수한 문화행태들을 싸잡아 거부하고 돌아앉은 냉소를 보인다. 그것은 인류의 발전사를 비웃는 천진한 어린 악마의 저주 같은 앙큼함으로도 비칠 수 있다. 그러나 임 선배의 순박한 화법과 그림 속의 화제가 엉성하게 엮어지는 장난스럼이 직선적 스토리들의 경직성을 어지간히 걸러주기 때문에 이야기에 숨겨진 해학적 야유는 전혀 흉물스럽지 않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할나위 없는 귀여운 한 풀이가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일단 쉬어 가자. 한 자리에서 모두 털어 놓을 수 없는 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 선배의 됨됨이와 그의 순결하고 매력적인 작업에 대해서 너무 많은 것을 걸러버리고 말았다. 언젠가 다시 이어서 쓸 날이 있을 것 같다. 임 선배의 작업에서 자주 등장하는 자신의 나체 드로잉이나 그림들, 캐랙터들 전부를 자신의 수염 난 얼굴로 대치시킨 춘향전의 새 버전, 바나나의 빈번한 등장(‘커다란 바나나를 먹자’,라는 제목의 일련의 설치작업, 벌거벗은 자신의 나체를 바나나로 된 치마를 두룬 모습) 등등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는 그의 작업 이미지들을 정신분석적 접근을 통해 정치하고 유별날 것만 같은 그의 무의식적 징후들의 세계를 탐험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2005, 10, 20,

* 이 글은 작가 임 동식의 도록에 서문 형식으로 실린 것을 전재 한 것임. 본문에 표기된 페이지는 도록의 페이지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