批 評

홍명섭을‘괴물’처럼 혹은 해석없이 읽는다
김 원 방
 



의태 - 우연히 예술처럼 보이기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적 아름다움의 한 전형을‘발작적 아름다움’(la beaute convulsive)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의 사례로서 소위‘의태현상’(mimetisme)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서 의태현상이란 눈의 형태를 하고 있는 나비 의 무늬, 식물의 형태를 닮은 바다 속의 산호암초, 천연동굴에서 발견되는 기이한 모습의 조각들 같은 것을 말한다. 우리 주변에서는 금강산의 만물상, 쌍촛대 바위 같은 사례가 그것이다. 이러한 의태는 넓은 의미에서는 왜상(歪像 Anamorphosis)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의 시선을 특정한 위치와 각도에 둘 때 그 사물들의 형태가 어 우러져 우연히도 전혀 예상치 않은 형상이 숨겨진 그림찾기처럼 나타난는 현상 말이다. 이는 사물이 자신의 형태를 자기 가 바깥에 투사하는 경우, 또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의 형상이 불안정하게 성립되는 경우라고도 설명할 수 있 다. 자기가 자기가 아닌 곳에 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소위‘내밀성’(intimacy, 佛intimite)의 개념은 무효화된다. 내밀 성은 소위 닫혀진 개체의 내적인 정신세계 혹은 자신 만의 속성같은 것에 관련된 개념이다. 쟈끄 라깡은 이러한 내밀성 에 대신하여‘외심성’(外心性, extimite)의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실제는 외부에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내면을 만들어 내며, 궁극적 타자가 나의 중심부에 살고 있지만 미지의 낯선 존재이다. 결국 주체의 중심은 외부에 존재한다는 의미이 다. 의태적 사물이 자신의 이마고(혹은 거울상)를 보고자 한다면, 이는 자신의 외부에 멀리 떨어진 곳에 놓여진 거울의 반 사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거기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은 자신이 본연적 형태와는 필연적 관련이 없는 형상 이다. 정말 이건 이상한 나르시시즘적 정신병리와 유사한 상황이다. 의태는 바로 그러한‘자아의 상실’, 그리고 거울의 기능을 수행하는 외부의 주체의 시선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예술 자체가 의태적일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막상 예술이 위치한 자리에는 예술이 없고 현실세계 속에서의 정황에 따라 우발적으로 예술일 수도 있는 이러한 가변적이고도 도태된 삶이 그 예술의‘필연적 숙명’이라면 말이다. 그러한 예술의 한 사례를 우리는 홍명섭을 통해 보고 있다. 그의 작업은 가장 일관되게 그러한 예술의‘존재론적 일탈’을 실험해 왔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저급한‘유사예술’(para-art), ‘하위예술’(infra-art), ‘적절한 예술의 결핍이나 여분’으로서만 다가오는 모호한 예술의 경계선들을 제시해 왔다. 홍명섭의 작업은 일단 난해한 인상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기가 힘들다는 불평도 있다. 홍명섭은 자기 작업과 관련하여 많은 독특한 글쓰기를 보여준 바 있지만, 이 글에서 나는 그가 제안한 개념들에 의거하지 않으면서(비평의 대상은 작품이지 작가나 작가의 글이 되어서는 안되므로) 홍명섭의 작업의 핵심적 면모를 가늠할 수 있는 몇가지 통로를 제안해 보려 한다.


범주, 해석 그리고 그 저편

   홍명섭 작업에 다가가기 위한 첫번째 통로는‘범주 혹은 해석의 저편’이란 개념이다. 이 말은‘범주와 해석들의 완전한 부재’라기보다는 그것들 간의 사이’를 의미한다. 나아가 홍명섭의 작업주제는‘예술작품이라는 범주 그 자체에 대해서’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예술 자체보다도 예술들 간의 그리고 예술과 현실 간의 범주적 메카니즘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 포스트모던 예술들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크게는 그러한 맥락 속에서 홍명섭의 작업은 범주에 대한‘메타’(초월 혹은 그 반대로의 퇴행)의 과정을 끊임없이 반영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관객으로 하여금“이게 무엇이다”라고 단언하게 만들기보다는“이게 무엇일까?”라고 되묻게 만드는 작업이다(오스틴Austin의 개념을 빌리자면‘확언적’constative이 아닌‘수행적’performative 작업). 그런데 여기서‘메타’로 표방되는 그의 반성적이고 비평적인 행로는 그 어떤 최종적인 메타언어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언어적 사유 자체의 실종 또는 비평적 해석의 불능성에 근접해 나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선「Looks like a......」, 「도깨비 붙은... 마치 도깨비 짓이듯」, 「마치‘변종’처럼...」, 「마치 동종요법처럼」등과 같은 소위「마치...」시리즈를 보자(그의 작업에서는 엄밀히 말해 이‘시리즈’란 표현도 자제해야 한다). 이것들은 알록달록한 밧줄이 마치‘뱀’인 양 느껴질 수도 있도록 실내나 실외에 배치해 놓은 것이다. 단 여기서 뱀으로 확고히 인식되도록 연출하기보다는 어딘가 뱀처럼 느껴질 수도 있도록 연출한다는 점, 그러한 잠재적 가능성의 연출을 중시한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 물체들은 일상적 사물이 좀 괴이하게 오인되도록 약간의 변장을 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자기가 아닌 다른 사물의 모습을 흉내(의태)낸다. 그것들은 뱀의 형상을 면밀히‘재현’한 것이 아니며 뱀인 듯 오인될 뿐이다. 또 하나의 사례로서 마치 독버섯처럼 보이도록 얼룩무늬칠을 한 우산들( 「얼룩무늬의 정치학」1996), 그리고 이번 전시에서 보여준 일종의‘계란 그림’( 「의태의 의태」2004) 등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형태나 사물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이다. 그것들은 두개 이상의 이질적인 독해의 가능성을 공존시킨 상태라고 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두가지의 독해 사이의 마찰과 결정불능성 같은 것이 상황을 지배하게 된다. 그것은 작품이 아닌 작품의 경계(틀)를, 대상들이 읽혀지는 상황성을, 대상들 간의 그리고 대상들과 이를 보는 자 사이의 우발적 접촉의 차원들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마르셀 뒤샹은‘초박막’(극도의 얇음, inframince)의 개념을 자신의 미학적 강령으로 노트해 놓았었다. “아주 얇은 비로드 바지를 입고 움직일 때 나는 소리나 음악은‘초박막’적인 상태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 나는 이러한 초박막에 의해서 2차원으로부터 3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3차원으로 넘어간다는 것’-- 이는 앞서 말한 외심성이라는 것과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폐쇄되고 자기참조적인 예술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주변의 입체적(3차원적) 시공간을 정황으로 빌어서 발언한다는 의미에서이다. 따라서 작품의 핵심적 주제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그것이 잠재적으로는 모종의 작품일 수도 있으리라는 기대 그리고 이미 그게 작품이었을 수도 있으리라는 과거에 대한 추정 만이 잔존하는 상황이다. 작품은 껍데기나 흔적, 계기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홍명섭의 작업은 그러한 모호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물과 사물, 기표와 기표의 얇은 접촉면에 주목하며 이런 점에서 뒤샹을 독특하게 발전시키는 면모를 보인다. 약간의 얼룩무늬, 약간의 변형을 통해‘밖의 차원’, 혹은 저편(meta)을 향한 운동을 끌어들인다. 그‘밖의 차원’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다. 알 수 있다면 결코 밖이 될 수 없을 것이므로. 단 이 알 수 없는 밖의 차원이 예술작품과 예술사라는 전통적 개념들을 해체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쟈끄 데리다는 회화의 핵심이 아닌 부수적이며 외적인 요소들(액자, 부수적 장식문양 등), 즉 소위 파레르곤(parergon)이 예술작품을 이론적 언어적으로 분석 될 수 없는 대상으로 변형시킨다고 말했다. 홍명섭의 작업은 바로이러한 이론적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을 환기시키고 사물의 질서를 교란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앎의 주변부를 통해 예술을‘탈-정의’(De-definition)해 나간다. 예술이론의 마지막 한계점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이다.
흔적- 장치
   두번째 통로는‘장치’또는‘배치’(dispositif)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장치(배치)는 분리된 여러 기계적 요소들 이 상호관련되어 함께 작동하는 메카니즘을 의미한다. 이것은 홍명섭의 작업에서 놓치기 쉽지만 범주의 해체와 관련하 여 필연적으로 따라나와야 하는 중요한 문제이다. 데리다의 파레르곤에 대한 논의에서는 중요한 점 한 가지가 누락되었 는데, 그 부수적이고 주변적 요소들이 실은 강력한 몸의 공간, 향유의 공간이란 사실이다. 대상의 저편 언저리에는 단지 ‘非-앎’이라는 창백하고 추상적인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언저리와 밖의 공간에서는 바로 신체적 카니발 이 시작된다. 뒤샹의 유명한 회전릴리프 시리즈(Rotorelief)의 경우 회전하는 원판들을 통해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신체 적 생리학적 자극을 최대한 고조시키는 작품이다. 그 작품은‘읽는 작품’(즉 이론적 앎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놀이장치에 올라 타듯이 경험하는 작품(생리적 체험의 대상)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이를“시각의 신체화”라고 부르기도 했 는데, 여기에는 일종의 맥동(pulse)이 있어서 우리는 줄넘기를 하듯이 신체적 흥분의 리듬을 타게 된다. 현대미술의 전 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화두는 뒤샹이 개시한 바로 이것, 즉 예술을 독립된 기호로부터 생리학적 체험의 장치로 진화시 켜 나갔다는 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회화와 조각으로부터 가상현실 체험장치로의 전환 말이다. 이를 보여주는 홍명섭의 작업으로서 이번에 표화랑에 전시된「Running Railroad」(달리는 철도)를 보자. 이는 캔버스 위에 테이프를 마치 철도같은 궤적 또는 철도의 흔적을 만들어 놓은 작업인데, 작가는 오래 전인 82년에도 유사한 작업을 전시한 바 있다. 이를 바라보게 되면 일종의 몰입 같은 현상이 생겨난다. 스포츠의 생리학적인 자극으로부터 개시되는 매우 원초적인 아니 말초적인 몸의 연극같은 것이다. 나는 그 궤적을 따라 이 캔버스에서 저 캔버스로 도약하고, 나아가 이것이 전시된 공간의 건축적 구조를 거스르며 관통한다. 이 작품은 달리 말하면 건축과 캔버스 등의 사물로 구성된 외화(外化)된 공간 즉 공적 공간을 나의 사적인 몸의 운동을 통해 거슬러 관통하고 유희하는 자극적 놀이라고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작품은 그러한 면에서 왜 우리의 생래적 몸은 그 자체가 모든 이념적 사유에 대해 본질적으로 위반적(transgressive)이고 카니발적이며 해체적일 수 밖에 없는가 하는 이유를 시사해 준다(홍명섭도 유사한 관점에서“본다는 것은 시지각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적 행위이다.(...) 우리 의식의 환각적이고 몽상적인 곡예(...)”라고 언급하였다.) 나는 이러한 장치로서의 특징이 일명‘발 껍질’시리즈에서도 강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脫題de-titled」, 「칼앙드레에게 바침Hommage to Carl Andre」등의 제목이 붙은 작업들). 이 시리즈는 실물이 부재하는 발의‘흔적’에 대한 개념적 성찰이나 재현의 문제에 대한 메타비평, 또는 매우 정신적인‘명상’에만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그러한 생각이 틀렸다기보다는‘흔적’과‘명상’을 앞서 말한바 대로 장치에 의거한 더욱 신체적인 체험으로서 나타내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바닥에 널려진 많은 발껍질들은 우리 신체를 유추적으로 그리고 환각적으로 그 안에 불러들이는 힘을 가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거의 무한하고 반복적이며 또한 다중적이고 분열적인신체운동을 뒤샹의「회전릴리프」처럼 가상적으로 만들어 낸다. 흔적이란 실물(실제의 발)의 부재이면서 동시에‘실물의 부재의 현재성’이다. 그리고 이 부재의 현재성은 공허한 공간이라기보다는 나의 몸이 강렬히 작동하는 에로틱한‘욕동(drive)의 공간’으로 나타난다. 그 발껍질들은 마치 껍질로부터 벗어난 유체이탈의 경험, 현세와 저승을 잇는 원격이동장치 같은 역할을 한다. 그것은 저 밖의 세상이 지금 이 곳에 실재하고 있다는 역동적 외심성의 상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홍명섭의‘철도’나‘발껍질’은 흔적학(ichnology)의 탐구대상이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몸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홍명섭의 과거와 미래를 괴물처럼 혹은 해석없이 읽는다.
   ‘작가론’이라고 하면, 그 작가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전 작업의 전개과정, 그리고 이로부터 미래의 작업의 향방을 가늠하는 글쓰기가 보통 포함된다. 하지만 홍명섭의 경우 그러한 과거와 미래를 파악하는 계몽적 작업이 무슨 대 단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 보통 작업의 전개에 대한 진술은‘형식주의적’이거나‘도상학적’관점에 의거할 수 밖에 없 다. 작품들 간의 형태적 혹은 주제적 유사성에 따라 묶음을 만들어 보인다는 것은, 홍명섭의 경우 그의 작업의 지향점을 너무나 왜곡하는 일이 될 수 있다. 형식, 형태, 도상, 묶음(범주), 이런 것들을 기본적으로 부정하고 이로부터 도주하려는 일련의 흔적, 즉‘예술의 흔적’, ‘예술의 껍데기’로 작업하려는 작가에게 고매한 기념비적 역사기록처럼 황당한게 또 있 을까? 단지 제한된 범위 내에서 한가지 주목하자면 홍명섭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미니멀아트나 개념미술보다는 마르셀 뒤샹에 유추시켜 고려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는 점이다. 미니멀아트는 앞선 미술사조들에 대한 오이디푸스적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을 특정한 형태적 코드 내부에 가둠으로써 자신을‘역사화’시켰고(소위“있는 그대로의(literal)의 사물” 에도 일련의 정형화된 스타일문화가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개념미술은 예술이 욕동적 몸을 위한 장치가 될 수 있 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반면 뒤샹은 작품이란 것이 현실공간과 심지어는 다른 예술작품과의 텍스트적 상호참조 속에서 정황적으로 드러나는 일종의‘문화적 담론’임을 알고 이를 적극적인 게임으로 바꾸어 낸 작가이다. 또한 그는「회전릴 리프」나「주어진」(Etant donne)에서 보듯이, 예술을 도상이 아닌 생리학적 변형장치로 바꾸어 낸 작가이다. 그런 면에 서 비록 미니멀리즘을 비롯한 다른 사조들과의 유사성을 부인할 필요는 없더라도, 홍명섭 작업의 제반 측면과 독창성은 뒤샹과의 대조를 통할 경우 가장 명료히 드러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홍명섭의 작업은‘작품’(work of art)이나 미술사적 범주보다는 문자 그대로 작업의 현재진행형(work 또는 working) 혹은 미완결태로, 혹은 예기치 않은 이탈과 변질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성의 양태로서 바라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의 작업은 이러한 잠재성의 차원에 머물면서 언제든지 제도화된 사물의 범주와 인식의 표면 위로 분출되어 판 을 와해시킬 준비를 하는 못된 충동의 차원에 기거한다고 보는 것이다. 잠재해 있으면서 범주를 붕괴시키려 돌아온다 --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홍명섭의 작업은 소위‘괴물’(monster)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문화이론과 정신 분석학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괴물이란 범주화, 시각화, 역사화 될 수 없는 존재 아닌 존재이다. 괴물은 범주의 붕괴, 사유의 종말이며, 잠재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이성과 의식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충동이고, 인식론적 그물망으로부터 도 망치는 힘이다. 괴물은‘사물의 질서’에 분류되기를 거절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고 배척된다. 홍명섭의 작업 전개는 마치 괴물을 좇듯이, 사유가 붕괴되는 접점을 찾듯이 보아야 한다. 해석 없이 또는 해석의 정착으로부터 끊임없 이 도피, 도약하면서 읽는 것이다. 홍명섭의 작업은 개개의 분리된 작품들에 주목하지 말고 모든 상이한 작품들을 서로 ‘무작위’로 대조하면서 일련의 분류나 해석이라는 예술적‘앎’으로부터 도피 혹은 도약하듯 읽는 것이다. 홍명섭의 작 업이 예술로 인정받는 것은 분명‘아이러니’이다. 그건 미술사가 이루어 놓은 수많은 범주와 이를 식별하는 스타일적 코 드체계로부터 도피하며, 이를 위해 자신을 괴물적 변종처럼 변형시키는 양상을 취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괴물은 탄생과 동시에 이념화, 정형화되어‘사산’된다. 홍명섭의 작업도 결국 예술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 은 또다시 출발하는 또하나의‘흔적-장치’로서의 기회를 필연적으로 부여받기 마련이다. 이로부터 다시 칼날처럼 틈새 를 개시하기 위한, 그럼으로써 그 안에 갇혀져 있던 차이의 힘들을 분출시키기 위한 흔적 말이다. “제도화된 흔적(la trace instituee)은 지시구조 내에 있는 차이의 보존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결코 고려될 수 없다(...)”(쟈끄 데리다). 홍명섭의 작업은 바로 그‘보존된 차이’를 우리의 현재 혹은 현존 속으로 불러 내려는 시도이다. 물론 공허한 짓으로 끝나고 그 러한 끝남이 반복되겠지만, 그 공허한 몸짓들은 분명 홍명섭과 이를 바라보는 자에게 있어 파괴, 도약, 죽음을 향한 욕동 을 조금씩 충족시켜준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내심 원하던 바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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