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 談


아래의 대담은 몇 전시회를 통해서 받았던 빈번했던 질문들을 나열해 본 것이다.

 
q: 베니스에서의 당신의 설치작업은 전시장이었던 카지노 벤드라민 궁의 17세기 실내 분위기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본인도 만족했는가?
a: 물론 나 또한 만족스런 결과로 본다. 그러나 당시 그 현란한 로코코풍의 실내 환경과 내 작업이 어떻게 달리 설치될 지는 나 또한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런, 예측하지 못했던 조건들의 수용이 나의 설치 작업에서 흥미로운 점들이기도 하다.



q: 왜 당신은 그렇게 부서지기 쉬운, 종이라는 연약한 재료를 각별히 선택하고 있는가?
a: 전통적인 딱딱한 조각적 재료가 갖는‘영구성을 역겨워 한다. 특히 이번 종이 발 작업은 곤충의 허물(껍질)과도 같이 부서지기 쉬운 연약한 느낌의 재료적 속성이 주는 정서 자체가 작업의 모티브가 되는 셈이기도 했다. 잠자리 날개처럼 부서지기 쉬운데서 도리어 생명의 징후를 엿볼 수 있지 않은가. 내 대부분의 작품의 경향은 무엇보다도 소멸되어 간다는 점에서 생명의 주기를 닮고 있다.
종이라는 재료는 몇 천년도 보존 될 수 있다. 하지만 세월에 변질되거나 쭈그러들거나 누렇게 바래가거나 하는 사실이 내 작업의 범위 안에서 흥미로운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되어 간다는 사태가 내 바람이기도 하다. 가령 예술품이‘영원히’남는다는 막연한 사실이 나에게는 불합리하고 못마땅하다고나 할까. 언제까지 미술관 마당에서 버티고 서서 얼마나 그런 권위와 영광을 누려야 하는 것인지 그것이 내게는 부끄럽고 당혹스런 문제다. 그렇게 된다면 예술품도 결국 권위의 상징물이 될 뿐이지 않겠는가. 또한 후배 세대의 감성을 존중해야 할 문제도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미술작품도 세월을 제압하는 횡포를 피해가야 하지 않을까? 공해문제가 따로 있겠는가. 그래서 미술관과는 다른 박물관의 기능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본다.
q: 당신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가 있는가? 당신의 작품을 과연 소장하려는 데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a: 나는 내 작품이 오래가길 바라지 않는다. 내 작품 대부분이 그렇듯 설치되어 나타났을 때 뿐 이지, 전시가 끝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다. 누구에 의해서건 소유되기가 어렵게 되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볼 때, 나 또한 다음 작업을 지속할 제작비가 문제가 된다. 팔아먹을 것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근래의 종이 작업은 형태가 남는 셈이지만.) 이런 점이 내게서 하나의 역설을 빚어낸다. 리차드 롱과 같은 작가도 자기 작업을 잘 팔아먹고 있다. 즉 그는 [증서]를 파는 것이다. 콘셉, 아이디어를 서류화한 [문서]로 파는 경우를 보았다. 나도 [흔적]을 팔아야할 텐데.

q:
당신 작업의 제목으로 [Homage to Carl Andre], [Homage to Richard Long] 이라고 한 것이 있는데, 롱의 원형배치와 당신의 원형배치가 같긴 해도 작업의 프로세스와 생각이 아주 다르다고 나는 생각한다. 독일에서 어느 여류평론가는 당신의 것과 롱의 것이 비슷한 것으로 오해하고 비난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그렇지 않음을 여러모로 설득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a: 우선 나는 칼 안드레와 리차드 롱을 어느 작가보다도 경애한다. 특히 롱의 작업태도와 작업방식을 좋아하고, 나와 내통하는 어떤 위상도 느끼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나의 엣세이를 통해서 열심히 소개해 왔다. 여기 얼마전에 출판된 나의 책 (나는 가방에서“미술과 비평사이”를 꺼내 보였다.) 속에서도 그를 나름대로 다뤄 보았다. 내가 롱을 경애한다는 내 제목은 나의 표현이다. 그리고 내가 롱의 원형배치를 채택하는 것 또한 나의 방법이다. 롱과의 오해를 불사하기도 한 한 방법이지만 롱과의 친화라 할까, 도리어 롱적인 이해를 강구하는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보다 형식적인 모습의 일치 (닮음)가 도리어 다름의 상호적 특성의 폭을 드러내기에 더욱 적절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혹시 오해를 두려워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을 우려했다면, 왜 하필 그런 제목을 굳이 쓰겠는가. 나아가서, 내가 존중하는 그들과 상통하는 지점이 보일 수 있도록 까지 염두에 두었다. 결국 안드레와 나는 생각하는 것이 너무 닮은데가 많았음도 알았다. 가령 수평적 공간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그 또한 자기 작업에서 대해서 [restfulness]나 [calmness] 란 말을 쓰고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었다. 나 또한 작업에서 수평구조를 휴식정신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번잡하게 들끓는 예술적 욕구들을 잠재우고 싶어한다고나 할까? 이런 명상적 시각구조는 오히려 안드레가 일본에서 배워간 것이다. 무엇보다도 롱과 안드레는 어느 서양조각가 보다도 영웅적인 제스처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특히 미국의 대지 미술가들은 대개 영웅적 제스처로 자연과 대결을 벌인다. 그러나 롱과 안드레는, 특히 앤디 골스워시같은 작가는 뭐랄까, 소극적이긴 하지만 자연과 더부른 페미스트적 제스처라 할 수도 있을, 사뭇 공손한, 세계에 대한 공손한 외경감으로 명상하는 제스처로 작업한다고 본다. 그렇게, 그들은 적어도 자연의 생성적 순환과 더불어 노래한다. 무엇보다도 서구의 전통조각들은 마치 바벨탑의 의지처럼 하늘은 향해 치솟고 대지를 제압하는 일종의 남근숭배적 관념이라고 할 수 있을, 영웅적이고 지배적인 관념을 펴고자 하였던데 비해, 수평의 평정을 회복하려하는 일련의 이런 영국 작가들의 작업태도들이 어느 모로든 나와 내통할 뿐 아니라, 내 작업을 통해서 그런 예술적 관념들을 더욱 확인시키고 싶은 것이다.


q:
왜 하필 발인가? 얼굴, 손이 아니고 발의 형태를 택하게 된 이유를 들을 수가 있는가?

a:
종종 받는 질문이 그런 것이다. 그 질문을 이야기로 풀어보자면, 얼굴은 그 표정 표현이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압도적인 부위가 될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발의 표정은 우리를 제압해오는 안간 중심적인 표정이 어쨋든 걸러지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손은 우리의 의지아래 가장 가까운 능동적인 상징 부위라고 볼 수 있다. 손의 기능은 보다 쟁취적이고 그 제스쳐는 민감하다. 거기에 비해 발은 보다 수동적으로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게 때문에 대지와의 교감을 이어주는 유일한 신체적 통로라고 할 수 있다. 대지와 가장 가까이서 대지의 음덕과 수평의 균형을 조화롭게 하는 뿌리와 같은 셈인데, 신체의 어느 부위 형태보
다도 익명적이다. 따라서 인종(忍從)과 숙명, 수난의 기관이라고나 할까. 또, 우리의 민속적 측면에서 보자면 발의 연장인 신발 이미지는 곧 대지와의 친화력을 띠는 순환(죽음과 탄생)의 상징이기도 하다. 존재와 부재 사이를 이어주는 이미지인 셈이다. 삶을 떠나가는 길목에 신발이 놓인다. 흔히 물에 몸을 던져 이 세상을 등지는 사람이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는 다는 것은 이승과의 하직을 고하는 의식이기도 한 것이다. 사자밥 옆에도 신발이 놓인다. 따라서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나는 이미지를 갖는 신발을 선물하지 않는다는 풍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벗겨진 신발은 실종과 상실의 기억이며, 존재의 껍질, 허물로서 부재와 이탈의 비유가 되어온다. 내가 흥미를 갖고 있는 탈바꿈의 껍질로 이탈과 순환, 존재와 부재 사이를 잇는 허물의 느낌은 역시 손보다는 발의 모습에서 찾게 된 것이다.
 
____존재의 무게학/느낌의 무게학/방부의 정치학--메멘토 모리 ; 망각과의 싸움터에 재현이 마치 유령처럼 강림하고--

“덧없는 것에 대한 고뇌가 없었다면, 기억이란 것도 필요치 않으리라 (레지스 드브레)." 재현이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재현의 감동은 어디서 오는가. 무상성, 영원하지 않는 모든 생명 현상은 자연현상, 즉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세계라는 것과의 싸움에서, 재현의 이미지는 마치 생명의 복원과도 같은 정신주의의 보상으로 또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삶과 죽음사이에서, 이미지는 재현의 기억으로, 방부의 이미지로 구실 한다. 현존도 부재도 아니면서 이마고는 장례의 시작에서 이미 시뮬라크름으로 나타난다. ‘마치 - 처럼’, ‘Als ob’. 같음과 다름이 동시에 전제되는 이상 한 척도들---
그래서 이미지는 그 자체로 불가능에 대한 신성화이면서 동시에 가능의 유사(의태)로 예찬되고 우상화된다. 불가능의 징후와 가능의 징후를 동시에 감추거나 드러내면서.

q:당신이 지난 카타로그에 제목으로 썼든 <on the meta-pattern>을 <회향녘>으로 번역한 것 같은데, <회향>은 불교용어이나 당신의 글 속에는 도교적 사상을 많이 빗대고 있다.

a:
불교 용어가 이미 중국에서 도교적으로 번안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이해하는 불교는 중국을 통해 도교화 된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회향녘>과 <on the meta-pattern>은 상호 번역하고 있는 말은 아니다. 무엇을 무엇으로 번역한다고 할 때, 그 무엇을 원전으로 하고 있느냐가 문제인데, 아마 요즘 말로 ‘상호원전적(inter-textuality)’이라고나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어느 것이 어느 것으로 변역된 제목이라기보다는 두 가지 측면 다 별개의 제목으로 접근했다고 보아주길 바란다.

q:
<회향>에 왜 <녘>자를 붙였는가?
a:<회향>자체는 너무 무겁기도한 말이다. 그래서 문학적인 감상을 끼워서 슬쩍 풀어헤쳐 보았다.




q:
이번 질문은, 당신이 <meta·form / meta·mind>라든가, <meta·sculputre>라는 말은 쓰고 있는데 이 때, meta란 metaphysic에서 처럼 사용되는 meta인가?


a:
알다시피 meta의 뜻은 다층적이다. 우선, 시간적 변화(change, 易)의 의미와 공간적으로 앞을 가리키는(before, 前) 위상과 뒤(after, 後)라는 방향성과 또는 그것과 반대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beyond, 超) 등의 의미작용을 포함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공간적인 <전/후, 위/아래>라는 위상이 시간적 차원에서 볼 때는 뒤집혀져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10년 전’이라는 말에서 보듯 <앞, 前>의 의미는 과거의 시간, 즉 뒤의 시간으로 변하고,‘10 년 후’라는 말에서 쓰여지는 <뒤, 後>라는 위상은 시간 속에서 미래라는 앞의 세월을 가리키는 것으로 뒤바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meta의 시간과 공간은 전도되거나 역류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아야한다. 따라서 그것은 meta·morphosis(변태)의 단계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meta의 공간적 위상만을 염두에 둔 개념으로 발전시킨 서구의 철학적 진리는 항상 절대공간 속에서만 진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 심취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진리’는 살아있는 진리로 실현되는 것 같지가 않다. 살아있는 진리의 작동은 시간, 즉 체험의 여러 속도들과 반영-이탈의 단계 속에서 어떻게든 변하고 미끄러지고 뒤집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금세기 여러 분야의 새로운 사고 유형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던 소설가 보르헤스는 <카프카와 그 선구자들>이라는 짤막한 에세이 속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카프카적 특질들은 이미 카프카가 나오기 전의 선구적 테스트들에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이 없었더라면 그것을 인지할 수 없었을 것이니, 나아가서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카프카 덕택에 그 선구자들을 상당히 다른 방법으로 세련되게 읽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들은 각자의 선구자들을 다른 방법으로 <창조>해낸다. 그 작업은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키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과거 개념까지 변화시킨다. 과거가 미래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를 변화시킨다. 이렇게 ‘창조적’시간은 얼마든지 거꾸로 흐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문화적 시간의 흐름도 간혹 역류하면서 창조적 과거나 타문화의 선구적 단계를‘창조’하는 시간을 살려낸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meta의 시간과 공간의 가역성들이 동시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내가 곧잘 사용해온<meta·form/meta·mind>나 <meta·sculpture>라는 말들은, 가령 조각이라면 조각의 단계라는 개념의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반전, 전도, 변태와 같은 흐름과 역류를 생명적 주기(생태, 생리) 속에서 더불어 파악하고 체험된다는 점을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1995)



내 작업들은 대체로 통념적 작품의 기관이라 할 구조나 질서들이 갖춰지기(분화되기) 이전의 모습들인 것 같다. 작품다운 모습으로 진화되기 이전의 기관 없는 작업들이라고나 할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기관--이런 의미에서 내가 즐겨 쓰는 말들 -- meta, para, ana 등등이 출현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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